패권(覇-으뜸 패, 權-권세 권)과 폐권(廢-폐할 폐, 權-권세 권)

세상은 힘을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그 힘이 제도와 구조로 고착화되면 우리는 그것을 ‘패권(覇權, hegemony)’이라 부릅니다. 국제정치에서는 강대국이, 국내 정치에서는 승리한 정당이 패권을 쥐고 다른 이들을 지배하거나 압도합니다. 전쟁처럼 패자는 모든 것을 잃고 승자는 모든 것을 차지하는 구조입니다. 이긴 자가 규칙을 정하고, 지배의 명분마저 독점합니다.

예로부터 그랬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자는 영토와 인명을 넘겨받았고 패자는 자존심마저 빼앗겼습니다. 심지어 기독교 역사에서도 이런 논리는 반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웠던 십자군 전쟁은 수많은 약탈과 폭력의 기록을 남겼습니다. 아무리 고귀한 이상이라도 그것을 실현하는 방식이 ‘전쟁’이라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오욕의 기록이 될 뿐입니다.

지금의 국제 정세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미국과 중국의 신냉전 구도, 우크라이나 전쟁, 중동의 혼란, 국내의 진영정치를 움직이는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패배는 몰락을 뜻하기 때문에 이기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극단의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정치뿐만이 아닙니다. 신앙 안에서도 이와 같은 ‘패권적 사고’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무엇이든 성경적으로 옳다고 믿는 순간, 다른 의견은 곧 ‘비성경적’인 일이 되어버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치부됩니다. 그래서 양보할 수 없고 타협과 이해가 불가한 대상으로 만듭니다. 우리는 지금 내가 믿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사고의 수렁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패권’입니까?

성경은 오히려 ‘패권’을 버리신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권력을 쥐기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의 권리’를 버리며 이 땅에 오셨고, 권력자들이 아닌 가난한 자와 병든 자,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심지어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죽임을 당함으로써 모든 권세 위에 계신 하나님 나라의 권위를 드러내셨습니다.

패권의 논리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시작부터 그런 길을 걸어왔습니다. 패권이 아닌 “폐권(廢權)”, 곧 자신이 가진 권리를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걷는 길 말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패권이 아니라, 권리를 내려놓고도 여전히 하나님 나라를 신뢰할 수 있는 믿음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이루시는 나라는 인간이 힘으로 쟁취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이기지 않아도 의를 행할 수 있고 지더라도 진리가 바로 서는 나라, 그 나라를 꿈꾸는 신앙 패러다임의 전환이 지금 우리에게 절실합니다.

지금 교회가 나뉘고 있습니다. 선교가 막히고 있습니다. 예배가 줄고 있습니다. 말씀이 자의적으로 해석되어 나의 주장과 정당성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패권을 잡으려 하면 할수록 교회는 무너집니다. 우리가 옳음을 증명하려 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사랑은 멀어집니다. 이기려는 욕망이 강해질수록 복음은 약해집니다.

이제는 다른 질문을 할 때입니다. ‘내가 옳은가?’가 아닌 ‘나는 주님의 길을 따르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승리는 누가 더 높이 올라가느냐가 아니라, 누가 더 낮아지느냐로 완성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긴 자가 지배하는 곳이 아니라, 섬긴 자가 다스리는 곳입니다.

세상의 헤게모니에 따르자면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이 세상이 힘의 질서와 논리의 승부, 다수의 정당성 위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반면 하나님 나라는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써 설득하려고 싸우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자신을 낮추셨고, 진리의 길을 묵묵히 걸으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까닭은 납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려함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바꾸려고 하지만 주님은 먼저 나를 고치십니다. 내가 달라지면 세상도 달라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먼저 내려놓읍시다. 이기려는 마음과 나의 옳음을 증명하고자 하는 욕망을. 그리고 다시 주님께 물읍시다.
“주님, 지금 내가 가는 이 길이 주님의 길입니까?”

2025년 4월 17일
이김 대표(TWR Korea 북방선교방송)